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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에 대해 알아보자 - 역사편 (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로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에 대해 알아보자 - 역사 편 (1)

영국 프리미어리그(EPL)를 대표하는 팀을 생각해 본다면 전 세계 축구 팬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일 것입니다. 전 세계 프로축구팀 중 SNS 팔로워 수 3위, 프리미어리그 팀 중 SNS 팔로워 수 1위란 지표는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팬덤과 역대 최고의 스타 선수들, 그리고 수많은 우승 기록까지.. 오늘은 맨유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철도 노동자의 팀, 뉴턴 히스 시절 (창단 ~ 1902년)

뉴턴 히스 로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시작은 현재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1878년, 영국의 랭커셔 엔드 요크셔 철도의 차량, 객차 부서 직원들이 현재의 조기축구와 같은 개념으로 취미로 만들었던 팀이 바로 맨유의 뿌리입니다. 이 팀의 이름이 뉴턴 히스 지부 실업팀인 뉴턴 히스 LYR F.C. (Newton Heath LYR F.C.)였고, 당시에는 회사 내 다른 부서 팀이나 다른 철도회사 팀과 경기를 치르는 형태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유니폼은 지금과는 달리 녹색과 노란색을 좌우 대칭으로 넣은 유니폼이었습니다. 1892년 철도 지부와의 연관을 끊고 'Newton Heath F.C.'로 이름을 변경하여 독립적인 클럽으로 탈바꿈하였고, 풋볼 리그에 참가하여 현재의 프로축구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재정 상태는 좋지 않았고, 경기력도 들쑥날쑥해 상위권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한마디로, '철도 회사 조기축구, 동호회 팀이 프로 무대에 적응하려 버티는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의 재탄생과 올드 트래포드 시대 (1902년 ~ 1945년)

뉴튼 히스는 1902년 2500파운드(대략 현재의 7.6억 원)의 부채로 인해 클럽이 위기에 빠졌는데, J.H. 데이비스의 투자로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주장인 해리 스태퍼드가 반려견을 기금 모금 행사에서 선보였고 J.H. 데이비스는 그 개를 분양받기 위해 스태퍼드에게 접근합니다. 그러나 그 개를 사랑한 해리 스태퍼드는 정중히 제안을 거절했고, 그 대신에 클럽에 투자해 줄 수 있는지 설득했다고 합니다. 한편 이 시기 클럽의 이름도 변경하자는 얘기가 나와서 '맨체스터 센트럴', '맨체스터 셀틱'이 제안되기도 했는데, 루이스 로카가 현재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제안해 1902년 4월 26일 지금과 같은 이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또한, 데이비스는 기존 유니폼의 색인 녹색과 금색 대신에 붉은색과 흰색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이름 변경은 단순한 리브랜딩이 아니라 '지역 철도 회사 팀'에서 '도시 전체를 대표하는 축구 클럽'으로 거듭나는 상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름을 변경한 덕분일까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해리 모거, 딕 더크워스, 찰리 로버츠를 앞세워 1905-06 시즌에서 2부 리그 2위를 차지하여 1부 리그로 마침내 승격을 달성합니다. 1908년에는 마침내 클럽 역사상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FA컵을 최초로 우승하는 겹경사를 이룹니다. 뒤이어 1910-11 시즌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하였고 해당 시즌에 'Old Trafford'로 홈구장을 이전합니다. 이때부터 올드 트래포드, 줄여서 OT는 맨유의 집이자, '꿈의 극장'(The Theatre of Dreams)이라는 별명을 얻는 상징적인 공간이 됩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 2차 세계대전(1939-1945)을 거치면서 영국 프로축구 리그 자체가 중단되거나 축소 운영되는 시기로 인해 클럽 역시 1922년에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일을 비롯한 불안정한 시기를 겪습니다. 게다가 올드 트래포드는 전쟁 중 폭격 피해를 입기도 하고, 이후 복구와 재정비를 통해 다시 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이 시기를 정리하면 '구단의 명칭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바뀌고 올드 트래포드도 건설되었지만, 세계 최강의 클럽과는 거리가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맷 버스비와 버스비의 아이들 그리고 뮌헨 참사 (1945년 ~ 1960년대 초)

1968년 2월 6일, 뮌헨 참사

 

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멘유의 역사는 맷 버스비라는 전설적인 감독을 선임하며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변화합니다. 그는 등장하면서부터 자신의 선수 선발권 및 선수 이적, 훈련 방법 등에서의 절대적인 권한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버스비가 성사시킨 첫 계약은 누구였을까요? 신기하게도 선수가 아니라 수석 코치 지미 머피였습니다. 버스비는 클럽이 육성하고 있는 유스 팀 선수들에 주목했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1군에 기용하면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유스 중심 팀'을 만들었습니다. 팬들은 이 팀의 선수들을 버스비의 아이들로 불렀습니다. 이 팀은 화끈한 공격 축구를 구사하면서 잉글랜드는 물론 앞으로 유럽 축구를 지배할 팀이라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팀의 눈부시고 찬란한 미래는 현재까지도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불리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끊어지고 맙니다. 1958년 2월 6일,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유러피언 컵 경기 직후 맨유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중간 경유지인 뮌헨에서 연료 공급을 받고 이륙을 하는 도중 이륙 실패로 공항의 경계벽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무안공항 참사와 비슷한..) 이 사고로 주전 선수 8명과 코칭스태프를 포함해 총 15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사고 발생 이전 2번의 이륙 시도가 이미 실패가 되었었지만, 잉글랜드 FA가 유러피언 컵 일정을 배려하지 않은 채 리그 일정을 강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3번째 이륙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이때도 충분한 속력을 내지 못해 이륙에 실패하였고, 벽에 충돌하고 맙니다. 버스비 감독도 비행기에 탑승한 상태였어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구조됩니다. 7명의 선수는 사고 당시 즉사하였고, 중상을 입은 선수인 던컨 에드워즈는 2주일 후에 병원에서 사망합니다. 던컨 에드워즈는 18세의 나이로 맨유에서 데뷔해 역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 유망주였습니다. 맨유의 현재이자 미래였던 이 선수가 사고 후 의식을 차린 상태에서 처음으로 한 말은 축구팬들의 가슴을 울리고 맙니다. "코치님, 리그 경기는 시작했나요?"

 

이 사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이자, '축구 역사 전체를 뒤흔든 참사'로 기록됩니다.

 

 4. 트리니티 트리오 & 유럽 정상 등극 (1960년대 후반)

OT에 위치한 트리니티 트리오 동상(왼쪽부터 베스트, 로, 찰턴)

 

뮌헨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클럽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라고 의문을 가졌지만, 맨유는 놀라운 명가 재건 스토리를 써 내려갑니다. 참사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바비 찰턴(Sir Bobby Charlton)은 현재의 10번, 8번 롤인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며 팀을 이끌었고, 당시 최고의 영입생이었던 데니스로(Dennis Law)와 북아일랜드 출신의 천재 윙어 조지 베스트(George Best)가 9번, 7번의 역할을 맡으며 맨유는 1963년 FA컵 우승, 1965년과 1967년에는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으며, 1968년에는 당대 최강팀이었던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벤피카를 4:1로 꺾고 드디어 유러피언 컵을 들어 올립니다. 이는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유럽 정상 등극이었고, 뮌헨 참사 이후 약 10년 만에 이룬 위대하고 찬란한 성과였습니다. 1960년대의 버스비 시대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유럽 올해의 선수(현재의 발롱도르)를 3명이나 배출하는 진귀한 기록을 올립니다. 1964년 수상자 데니스로, 1966년 수상자 바비 찰턴, 1968년 수상자로 조지 베스트가 선정됩니다. 이후 1969년 버스비는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맨유의 첫 번째 찬란했던 시기는 막을 내립니다.